독수리는 어쩌다 용맹의 상징이 되었나?

사냥할 줄 모르는 독수리가 왜 우리 사회에서 용맹의 상징이 되었을까? 독수리는 청소 동물이어서 용맹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의 어감이 그럴듯해서 점차 용맹의 뜻이 더해지다가 애니메이션 독수리 오형제의 등장을 계기로 용맹의 상징으로 굳어진 걸로 보인다.

늦가을쯤 하늘 높이 보이는 독수리

시골에 살다 보니 여러 새가 눈에 보인다. 맹금류는 가끔 본다. 내가 본 대형 맹금류 중에는 수리부엉이가 있다. 나는 야생 동물을 좋아하지만 돌아다니는 건 별로 즐기지 않아서 어디 멀리는 잘 안 간다. 그런데도 우연히 재수 좋게 수리부엉이를 보았다. 정확히 동정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크기가 워낙 큰 부엉이라서 그게 그냥 수리부엉이라고 믿고 있다. 저녁에 지붕 위를 지나가는 모습을 두 번 보았고, 낮에 뒷산에서 여러 번 보았다. 고맙게도 낮에 내 머리 위로 날아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동하는 모습을 몇 번 보여주었다. 깊은 산이 아닌데도 수리부엉이가 있는 것이 신기했다.

독수리
독수리. 머리털이 적어서 대머리 독(禿)자가 붙어 있다.

독수리도 게으른 내 눈에 매년 비치는 고마운 새이다. 그런데 너무 높게 나는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가까이에서는 볼 기회가 없었다. 한 10월이나 늦가을쯤 되면 슬슬 독수리가 하늘에 나타난다. 그들은 몽골 등 북쪽 지역에서 태어난 어린 독수리인데 먹이가 부족한 겨울에 먹이 경쟁에서 밀려서 남하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독수리 먹이를 챙겨주는 분들이 여럿 있어서 독수리들이 겨울에 우리나라를 잘 찾아온다고 한다.

독수리가 용맹한가?

독수리는 조류 중에서도 크기가 아주 큰 편에 속한다. 생김새만 보면 전문 사냥꾼이지만 사실은 사냥할 줄 모른다. 그런데 고기는 좋아한다. 사냥하지 않고 고기를 먹기 위해서 죽은 동물을 찾아다닌다. 그래서 독수리를 청소 동물이라고 한다. 가을부터 봄까지 독수리가 내 눈에 곧잘 띄는 이유는 내가 하늘을 가끔 올려다보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독수리가 동물 사체를 찾기 위해서 하늘 높이 날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바람을 타고 여유롭게 이리저리 활공하는 모습은 참 멋있다.

독수리는 다 죽어 가는 동물의 목숨을 끊을 줄도 모른다. 영상에서 못 보았으면 나도 못 믿었을 것이다. 부리로 한 번만 콕 쪼아도 죽일 수 있을 텐데 못 죽인다. 그들에게는 살생 유전자가 없다. 그들은 그 동물이 죽을 때까지 그냥 옆에 죽치고 앉아서 기다린다. 죽고 나면 그때야 먹는다.

전생의 수도승이 독수리로 환생했나? 착해도 이렇게 착할 수가 없다. 용맹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독수리도 용맹할 때가 있기는 하다. 자기가 먹고 있는 것을 다른 맹금이 와서 뺏어 먹으려고 하면 용감하게 맞서서 먹이를 뺏기지 않으려고 한다. 상대방을 죽일 줄은 몰라도 완전 숙맥은 아니다.

어쩌다 용맹의 상징이 되었을까?

사전적인 의미

표준 국어대사전에는 독수리에 두 가지 뜻이 나온다. 첫 번째 뜻은 내가 이 글에서 다루는 그 큼직한 날짐승이다(첫 번째 사진의 저 새이다. 영어 단어로는 Cinereous vulture( = 잿빛의 vulture)). 두 번째 뜻은 ‘수릿과의 독수리, 참수리, 검독수리 따위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word_no=87751&searchKeywordTo=3

나는 독수리의 저 두 번째 뜻이 들어간 경위가 의심스럽다. 표준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바뀐다. 저 두 번째 뜻은 원래 없던 것인데 우리 일상 언어의 현실을 반영하여 나중에 들어간 것으로 본다. 그 경위를 이제부터 추론해 보겠다.

검독수리
검독수리는 대단히 용맹하다. 초원의 하늘을 지배한다.

독수리 오형제 때문이다.

나는 독수리 오형제 때문에 독수리가 용맹의 상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독수리 오형제는 내가 어릴 때 방송됐던 애니메이션이다. 그때는 애니메이션이라고 안 하고 ‘만화 영화’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그때 독수리 오형제를 잘 못 보았다. 아마 우리 집 TV에 TBC가 안 나왔던 것 같다. 나중에 다른 방송국에서 방영했을 때는 내가 그런 거 보고 있을 나이는 아니었다. 방송은 못 보았지만, 그런 게 있는지는 다 알고 있었다. 특히 그 주제가는 여기저기서 많이 나와서 그냥 귀에 익었다. 독!수리. 오.형.제. 주제가만 들어봐도 그들이 용감하다는 건 다 알겠다. 그러니 독수리가 용맹의 상징이 되는 건 당연하다.

어감이 좋아서 용맹의 상징이 되었다.

아마 독수리는 대한민국에서나 용맹의 상징일 거다. 독수리 오형제의 일본 원작은 제목이 다르기 때문이다.

《독수리 오형제》는 일본 다쓰노코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공상과학물 애니메이션이다. 원제목은 과학닌자대 갓챠맨(일본어: 科学忍者隊ガッチャマン 카가쿠닌자타이 갓챠만[*], Science Ninja Team Gatchaman)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C%88%98%EB%A6%AC_%EC%98%A4%ED%98%95%EC%A0%9C

원제가 어렵다. 번역가가 제목을 독수리 오형제로 간단하게 고친 건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지만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번역가는 독수리의 독이 대머리 독(禿)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 즉, 독수리는 ‘대머리 수리’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용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는가? 단연코 용맹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 번역가가 왜 하필 독수리라고 갖다 붙였을까? 독수리 오형제 중 한 명의 극 중 이름이 큰 독수리의 켄(大鷲の健)이라고 한다.
https://namu.wiki/w/%EB%8F%85%EC%88%98%EB%A6%AC%20%EC%BC%84

일본어 사전에는 대취(大鷲)가 흰죽지참수리라고 나온다. 鷲는 한자 사전에 ‘독수리 취’라고, 나오므로 번역가가 독수리라고 번역한 것 같다. 참수리는 용맹한 새이다. 대한민국 경찰에서 참수리를 상징으로 쓰고 있을 정도이다. 애니메이션 제목을 ‘참수리 오형제’나 ‘수리 오형제’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참수리는 우리나라에 겨울을 나러 오는 겨울 철새이다.

참수리
참수리. 사냥하는 수리류 중에서 몸무게가 제일 무겁고 힘이 세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독수리의 두 번째 뜻’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번역가가 저렇게 번역했겠지.

그럼, 이제부터 독수리의 두 번째 뜻, ‘수릿과의 독수리, 참수리, 검독수리 따위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 왜 더해졌는지 추론해 보겠다. 나는 발음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독수리! 뭔가 멋있게 들린다. 대머리라는 뜻을 모른 채 ‘독수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뭔가 멋있고 용맹한 새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쉽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한문, 한자 전문가이니 당연히 대머리라는 뜻이 들어 있음을 알았겠지만, 20세기로 들어오면서 한글이 공용문자가 되면서 ‘대머리’가 점점 잊혔을 것이다. 이렇게 멋있게 들리는 말 속에 설마 ‘대머리’가 숨어 있을 거라고 요즘 사람 중에 몇이나 상상하겠나? 옥편, 사전 찾아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차츰 독수리라는 말에 원래는 없던 ‘멋있는 의미’가 더해지다가 독수리의 두 번째 뜻이 사전에까지 올라가게 되었을 거로 나는 추측한다.

‘독수리’라는 말이 뜬 이유 요약

독수리가 대머리라서 용맹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독수리의 적은 머리숱은 청소 동물인 독수리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 독수리라는 말은 원래 죽은 동물을 먹는다는 의미로 쓰이던 말이다. 배가 고프면 이것저것 다 먹어야 한다. 죽은 지 오래된 동물은 부패가 심할 수도 있는데 부패한 물질이 몸에 묻어서 좋을 게 없다. 이 새의 머리털이 적어진 이유도 죽은 동물을 파먹을 때 머리에 이물질이 덜 묻게 하려고 적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머리 독(禿)자가 붙었다. 또한 독수리의 소화액은 대단해 강력해서 웬만큼 상한 고기를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독수리는 죽은 동물을 먹고 살도록 철저하게 적응한 새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청소 동물을 상징하는 대머리라는 뜻은 점점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멋있게 들리는 ‘독수리’라는 발음으로 인해 ‘용맹’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급기야 애니메이션의 제목으로까지 채택되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독수리=용맹’이라는 등식이 생겨 버렸다.

흰꼬리수리
흰꼬리수리. 사냥하는 수리류 중에서 날개가 제일 커서 천천히 활공하는 모습이 아주 멋있다. 이런 새를 용맹하다고 하면 아주 적절하다. 독수리는 이 새보다 크지만 용맹한지는 의문이다.

발음과 어감에는 부연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리에 민감한 듯하다. 예를 들어 한자를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같이 쓰지만 한국인 이름과 중국인 이름에 잘 쓰이는 한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바둑 뉴스를 자주 읽어서 중국 기사 이름을 보면서 늘 그렇게 느낀다. 중국에는 우리나라에서 잘 안 쓸 것 같은 이름을 한 기사들이 많이 있다. 구리(고력), 루이나이웨이(예내위) 등이 있고, 마샤오춘(마효춘)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여자 이름으로 치는데 남자가 쓰고 있다. 중국 사람은 한자를 주로 뜻으로 이해하지만, 한국인은 한자의 뜻뿐만 아니라 어감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가 좋아하는 소리는 따로 있다. 독수리는 말은 발음 때문에 득을 본 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eagle vs vulture

영어에서 eagle 은 참수리, 검독수리, 흰꼬리수리, 흰머리수리 등 사냥할 줄 아는 수리류를 의미한다. vulture 는 독수리, 콘도르처럼 사냥은 할 줄 모르고 고기는 좋아해서 동물 사체만 찾아다니는 새들을 말한다. 그런데 영한사전에는 eagle 이나 vulture 나 다 독수리라고 나온다. 독수리라는 말을 좁은 의미의 뜻으로만 쓰지 않고 ‘두 번째 뜻’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도 쓰니까 이런 혼란이 있다. 참고로, 사냥꾼인 검독수리에 독수리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도 유감이다. 다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검독수리에 대머리 독을 함께 적지는 않았다. 어원이 다를 수도 있겠다.

흰머리수리
흰머리수리. 미국의 상징이다.

독수리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만 썼으면 좋겠다.

독수리라는 말의 어원을 생각해 볼 때 이 말에 두 번째 뜻 즉 사냥꾼 수리류까지 포함된 것은 유감스럽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정보의 부족이 한몫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고 유튜브로 훌륭한 동물 영상도 많이 볼 수 있어서 독수리의 실제 모습을 접한 사람이 많다. 독수리는 착하고 신기한 청소 동물이지 사냥꾼이 아니다. 이제는 많이들 알았을 테니 더 이상 독수리를 용맹의 상징으로 쓰지 말았으면 한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면 용어 사용의 혼란도 줄어들고 국어사전도 제대로 고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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